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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ure reading/Colossians +15
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8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마치 영화의 엔딩 크레딧과 같이, 바울과 함께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두기고, 오네시모,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에바브라, 누가, 데마 ... 바울은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의 사역이 가능했다. 몇몇 이름이 익숙한데, 그중에 '오네시모'가 있다. 빌레몬서에 따르면 그는 골로새 교회의 중요한 인물인 빌레몬(그의에서 교회가 모인 듯하다, 몬1:2)의 노예였다. 그것도 빌레몬으로부터 도망나온 노예였다. 그런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 부르며 다시 골로새로 보내고 있다(v9). 빌레몬에게 따로 보낸 편지에서는 그를 종이 아니라 '형제로 대하라(몬 1:16)'고 하면서 혹시 오네시모가 진 빚이 있다면 그걸 자기한테 돌리라고 (몬 1:18)한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에 불과했던 당시에 이런 파격적인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처럼 세상을 뒤집는 그런 능력이 당시 교회에 있었다. 이런 '변혁적'인 교회의 모습이 '국가교회', '체제의 수호자'로 변질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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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5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최근 "작은 교회는 실패한 교회"라고 설교한 대형교회 목사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가 출석교인의 수를 마치 기업의 매출인양 대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전도'는 '교인 수 늘리기'와 동의어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오늘 본문의, 감옥에서도 전도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니 말로 표현하기 어렵게 마음이 쓰리다. 앞에서 얘기한 그 대형교회 목사의 영어이름은 David이다. 그는 바울과 같은 목회자가 아니라 다윗과 같은 왕이 되고 싶어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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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어제의 이어 오늘의 본문도 그러하다.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울이 '노예제도'를 찬성하면서 상전들에게 '의와 공평'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바른 성경해석이 아니다. 오히려 상전들에게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v1)'을 경고하는 부분의 '전향성'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전향성'을 바탕으로 실천적으로는 한걸음 더 나가야 한다. 천몇백년 전 바울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바울 시대에 바울의 메시지가 가졌을 만큼의 크기의 도전을 오늘날 사회에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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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존 스토트는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The Contemporary Christian)'에서 성경을 2개의 문화 컨텍스트를 통해서 읽어야 한다고 했다. 하나는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문화고 또 하나는 오늘날의 문화이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렇게 읽어야만 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읽지 않고 문자 그대로 오늘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문화를 배경으로 오늘 본문을 바라본다면, 아내 뿐 아니라 남편에게, 자녀 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어떠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남편이 아내를, 부모가 자녀를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당시의 문화에서 이렇게 '상호적'인 관계를 요구한다는 것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이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갈라디아서 5:13의 바울의 메시지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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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v12)'.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마녀사냥과 (자기들 입장에서) 이단자를 화형하던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를 제대로 반성은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람들을 쉬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아닌지. 최근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악법이라고 부르며 대대적으로 반대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습 속에서는 소외된 자와 약자들의 편이셨던 '예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음에도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목을 조르는 악한 종(마 18:23-34)의 모습과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v13)는 바울의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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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위의 것과 땅의 것을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오늘의 본문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이어져 오는 문맥에서 바울은 율법적 행위를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의 것과 땅의 것은 특정 사물이나 직업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삶을 사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곧, 위의 것을 추구하는 태도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땅의 것을 추구하는 태도의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v5에서 땅의 것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등이라고 구체적으로 웅변한다. 이것들의 특징은 예수께서 강조하신 '이타적'인 삶과 대비되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삶가운데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에 차별이 없이'(v11) 그리스도를 따르는 누구에게나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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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에서 '개포동 큰빛 교회 권사와 장로'라고 등장해서 기독교인들이 흔히 보여주는 말투와 몸짓으로 노래를 하는 개그맨들을 보고 한참 웃은 기억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기독교'는 이러한 말투와 몸짓으로 대표되는 것 같다. 또한, 술담배를 안하는 것,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들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또다른 문제는 바로 이러한 지나친 '종교화'가 아닐까 싶다. 일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뭔가 특별한 듯한 말투와 용어, 몸짓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좀더 '종교적'이라고 과시하는 것은 오늘 바울의 말마따나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v23) 한글판 메시지 성경의 번역은 더욱 적나라하다. "한껏 폼을 잡고 이야기하면, 그런 것들이 인상적으로 들리기는 합니다. 심지어 경건하거나 겸손해 보이며 금욕하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신을 과시하고 드러내 보이는 또 다른 방편에 불과합니다.(v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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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를 지키는 것과 같은 일들로 골로새 교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매주 교회에 나가는 것이나 술, 담배를 안하는 것과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소한 일들로 신앙의 척도를 삼는 모습과 유사하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자의 본체는 바로 그리스도이다(v17). 그림자에 치중해서 본질을 놓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은 너무 분명하다.

여기서 '몸'이란 표현을 사용한 김에 바울은 한번 더 몸의 비유를 사용하는 것 같다. 곧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된 교회.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v18)를 하는 자들은 '머리를 붙들지 않는'(v19) 것이다. 정작 그리스도위 삶을 따르지 않고 나름의 '종교행위'만을 강조하는 교회는 '머리없는 괴물'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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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월터 윙크는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라는 책에서 이땅의 지배체제가 곧 사탄적임을 지적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께서 이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v15)고 전한다. 세례(침례)를 통해 그와 함께 죽고 산 그리스도인들은(v12) 이 예수를 따라 '행해야(살아야)'(v6)한다. 그것은 바로 이 악한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v8). 명문대 진학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내 집 마련하고 재테크를 통해서 재산을 불려가는 것, 이러한 것만을 추구하는 삶이야말로 '사람의 전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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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세상엔 혼자할 수 없는 두가지 일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이다. 오늘 본문의 바울에게서도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v1).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일이 무척 피곤하게 느껴진다. 반면에 누군가가 나한테 관심을 갖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반드시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교제 곧 코이노니아를 필요로 한다. 칼 바르트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이 코이노니아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러한 교제를 'tapestry of love'( v2)라고 표현했다. 나는 여기서 '퀼트'를 떠올렸다. 미국에 온뒤 아내는 퀼트를 배워서 이불이나 가방 등을 만들곤 했다. 한번은 교회의 한 자매를 위해 다른 자매들이 공동으로 퀼트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각자 작은 천을 바느질해서 모아 하나의 큰 작품을 만드는 퀼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생생한 비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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