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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ure reading/Colossians +15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아마도 감옥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v24)이라는 표현은 그가 감옥에 있는 이유가 단순한 범법행위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념에 따라 체제에 저항하는 삶에는 고난이 따른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이후 국가종교화된 기독교는 이러한 정신을 잃었다. 거기다 요즘의 소위 '장로 대통령'치하의 한국 교회는 오히려 도덕적 비난에 직면해 있다.


바울이 이렇게 고난당하면서도 지키려는 '비밀'은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v27)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비밀'은 '시크릿'이라는 말도 안되는 성공복음의 책의 유행으로 상징된다. 대형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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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는 이 구호가 선포되는 방식의 무례함 뿐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왜곡한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마치 사람들이 현재는 중립적 상황인데 여기서 예수를 믿어 천국을 갈 것인지 아니면 믿지 않는 것을 선택해서 지옥을 갈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같이 우리는 모두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v21) 상태인 것이다. 이미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우리를 그의 죽으심(v22)으로 구원하신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v23)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요 3:17)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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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기독교의 '기독'은 '그리스도'의 음차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신앙의 고백이 그 핵심인 것이고 그를 통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v15)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를 곰곰히 돌아보면 조금 이상한 점들이 많이 보인다. 성직자들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구약의 제사장의 후손인 것처럼 행동하고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등 오히려 유대교에 유사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구약의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 만큼 신약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산상수훈'을 강조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이땅위에 오시고 삶으로 말씀으로 하나님을 보이신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가 없다. 그는 만물을 그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원하신다(v20).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이라면 당연히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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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바울의 골로새 교회를 위한 기도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기도와 너무 다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돈을 많이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더' 잘되는, '꼬리가 되지않고 머리가 되게'해달라는 기도들을 많이 들어봤다. 그럴 때 마다 드는 생각은, 누구나 1등이 되려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는가였다.

다른사람과 비교되는 상대적 가치를 위한 기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선 (정원에 제한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자녀가 떨어져야 하고, 내가 어떤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한다. 오히려, 오늘 바울의 기도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v9)과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v10)과 같은 절대적 가치를 위해 기도해야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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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들로부터 말도 안되는 문제들이 보여지고 있지만, 예수께서 이땅에 남겨두신 것이 그를 따르는 작은 무리, 곧 교회임은 너무나 신비한 일이다. 신분도, 재산도, 학력도 다른 사람들이 오직 예수를 따르는 믿음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한다. 그리고 서로를 형제(v2)라 부른다.

그러나, 요즘의 한국교회에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아니라 건물이 '교회'가 되고, 조직이 형제애를 대체하는 것을 보게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다. 심지어 자본주의의 원칙으로 운영되고 마케팅되기까지 하는 교회...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께서 작은 무리를 남겨두신 것은 결국 실패한 것인가? 감히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고 싶다. 커다란 빌딩과 높은 첨탑이 아닌, 진실한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좇는 '작은 무리'가 세계 곳곳에 있음을 믿는다. 그들과 함께 '형제'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소망을 여전히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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