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do at 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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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를 지키는 것과 같은 일들로 골로새 교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매주 교회에 나가는 것이나 술, 담배를 안하는 것과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소한 일들로 신앙의 척도를 삼는 모습과 유사하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자의 본체는 바로 그리스도이다(v17). 그림자에 치중해서 본질을 놓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은 너무 분명하다.

여기서 '몸'이란 표현을 사용한 김에 바울은 한번 더 몸의 비유를 사용하는 것 같다. 곧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된 교회.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v18)를 하는 자들은 '머리를 붙들지 않는'(v19) 것이다. 정작 그리스도위 삶을 따르지 않고 나름의 '종교행위'만을 강조하는 교회는 '머리없는 괴물'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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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월터 윙크는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라는 책에서 이땅의 지배체제가 곧 사탄적임을 지적하였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께서 이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v15)고 전한다. 세례(침례)를 통해 그와 함께 죽고 산 그리스도인들은(v12) 이 예수를 따라 '행해야(살아야)'(v6)한다. 그것은 바로 이 악한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v8). 명문대 진학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내 집 마련하고 재테크를 통해서 재산을 불려가는 것, 이러한 것만을 추구하는 삶이야말로 '사람의 전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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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세상엔 혼자할 수 없는 두가지 일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이다. 오늘 본문의 바울에게서도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v1).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일이 무척 피곤하게 느껴진다. 반면에 누군가가 나한테 관심을 갖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반드시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교제 곧 코이노니아를 필요로 한다. 칼 바르트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이 코이노니아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러한 교제를 'tapestry of love'( v2)라고 표현했다. 나는 여기서 '퀼트'를 떠올렸다. 미국에 온뒤 아내는 퀼트를 배워서 이불이나 가방 등을 만들곤 했다. 한번은 교회의 한 자매를 위해 다른 자매들이 공동으로 퀼트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각자 작은 천을 바느질해서 모아 하나의 큰 작품을 만드는 퀼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생생한 비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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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아마도 감옥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v24)이라는 표현은 그가 감옥에 있는 이유가 단순한 범법행위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념에 따라 체제에 저항하는 삶에는 고난이 따른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이후 국가종교화된 기독교는 이러한 정신을 잃었다. 거기다 요즘의 소위 '장로 대통령'치하의 한국 교회는 오히려 도덕적 비난에 직면해 있다.


바울이 이렇게 고난당하면서도 지키려는 '비밀'은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v27)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비밀'은 '시크릿'이라는 말도 안되는 성공복음의 책의 유행으로 상징된다. 대형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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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는 이 구호가 선포되는 방식의 무례함 뿐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왜곡한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마치 사람들이 현재는 중립적 상황인데 여기서 예수를 믿어 천국을 갈 것인지 아니면 믿지 않는 것을 선택해서 지옥을 갈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같이 우리는 모두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v21) 상태인 것이다. 이미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우리를 그의 죽으심(v22)으로 구원하신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v23)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요 3:17)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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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기독교의 '기독'은 '그리스도'의 음차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신앙의 고백이 그 핵심인 것이고 그를 통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v15)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를 곰곰히 돌아보면 조금 이상한 점들이 많이 보인다. 성직자들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구약의 제사장의 후손인 것처럼 행동하고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등 오히려 유대교에 유사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구약의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 만큼 신약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산상수훈'을 강조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이땅위에 오시고 삶으로 말씀으로 하나님을 보이신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가 없다. 그는 만물을 그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원하신다(v20).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이라면 당연히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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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바울의 골로새 교회를 위한 기도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기도와 너무 다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돈을 많이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더' 잘되는, '꼬리가 되지않고 머리가 되게'해달라는 기도들을 많이 들어봤다. 그럴 때 마다 드는 생각은, 누구나 1등이 되려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는가였다.

다른사람과 비교되는 상대적 가치를 위한 기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선 (정원에 제한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자녀가 떨어져야 하고, 내가 어떤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한다. 오히려, 오늘 바울의 기도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v9)과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v10)과 같은 절대적 가치를 위해 기도해야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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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들로부터 말도 안되는 문제들이 보여지고 있지만, 예수께서 이땅에 남겨두신 것이 그를 따르는 작은 무리, 곧 교회임은 너무나 신비한 일이다. 신분도, 재산도, 학력도 다른 사람들이 오직 예수를 따르는 믿음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한다. 그리고 서로를 형제(v2)라 부른다.

그러나, 요즘의 한국교회에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아니라 건물이 '교회'가 되고, 조직이 형제애를 대체하는 것을 보게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다. 심지어 자본주의의 원칙으로 운영되고 마케팅되기까지 하는 교회...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께서 작은 무리를 남겨두신 것은 결국 실패한 것인가? 감히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고 싶다. 커다란 빌딩과 높은 첨탑이 아닌, 진실한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좇는 '작은 무리'가 세계 곳곳에 있음을 믿는다. 그들과 함께 '형제'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소망을 여전히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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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10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12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1. 본문은 전도서의 결론으로 전도서의 목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허무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미 있고 참되게 사는 길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9-10절). 전도서의 말씀이 힘들지라도, 전도서는 인생이 가야할 방향을 바르게 보여주고 있습니다(11절). 전도자의 지혜가 내 인생에 깊이 박히도록 기도합시다.

'전도자의 지혜'라... 개인적으로 전도서에서 이야기하는 전도자의 지혜가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전도서를 솔로몬이 지었다라고 하는 전통적 해석과 솔로몬의 삶에 대한 실망 때문에 생긴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강조 외에는 흔한 처세술 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가 씌어졌을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인간의 한계는 여전하고 삶의 모순도 그러하다. 어쩌면 그것때문에 '전도서'가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는 지 모르겠다.

2. 지식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다 헛된 일입니다(12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바른 모습입니다(13절).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며(14절),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고(마 6:33),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합시다(살전 5:16-18).

오늘의 결론은 전도서가 왜 성경에 포함되어 있어야하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아는'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 (약 2:26)이듯이 실천이 없는 지식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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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6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1. 젊은 때는 일에 열중하고 성취감을 좇아 살아가지만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하루하루 젊음은 사그라지고, 육체는 힘을 잃고,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3-7절). 젊을수록 오히려 죽음을 마주하고 삶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죽음을 아는 젊음은 생기발랄하나 진지하고, 야망이 넘치나 깊이가 있으며, 두려움이 없으나 겸손합니다.


1992년, 내가 고3 수험생이었을 때 한국은 '다미선교회'라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단체에 의해 시끄러웠다. 그때 어떤 목사님이 '왜 지구의 종말만 걱정하고, 자기의 종말은 걱정하지 않는가, 오늘 당장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데'라고 비판하던 일이 기억난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삶엔 끝이 없을 것처럼 산다. 젊을 수록 그렇다. 지금의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벧전 1:24), 우리 인생은 '날아가는 것처럼 빨리 지나간다'(시 90:10).

2. 전도자는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아,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 창조주를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1, 7절). 사람이 ‘생명의 창조주’께로 나가지 않는다면, 죽음 가운데 모든 것이 헛되이 끝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님, 그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성령님을 기억하며 찬양합시다.

이러한 '인간의 유한함' 앞에서, 좌절하고 냉소할 것인가 아니면 창조주를 찾아 그에게 굴복할 것인가의 두가지 선택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12:1, 개역한글)고 권한다. 대학 신입생시절, 학교안 큰 길엔 여러 동아리들이 걸어놓은 플래카드들이 가득했다. 그중에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이 다른 말 하나 없이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라고만 적힌 ivf의 플래카드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말씀은 계속 내게 울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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